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고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도 한다. 사람의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들도 있는 까닭이다. 만약 이 모든 게 통제 가능한 성질이었다면 이 세계에 실패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G90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출시 전부터 안 좋은 의미로 시장을 흔들었다. 출시 직전에 공개됐던 유출 사진보다는 실물이 나았던 점이 다행이지만 여전히 호불호는 나뉜 상태다. 좋은 쪽으로 수렴하지 않은 여론은 판매량에 악재다. G90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자리를 못 잡는 사이에 K9의 안정감이 돋보이는 요즘이다. 2019년 인사 시즌(2018년 12월~2019년 2월)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대비 857% 늘어났다.

 김태현 기자

최근 어떤 준중형 세단은 디자이너의 개성이 너무 강하게 반영된 탓에 사실상 신차 효과가 없었고 쭉 잘 팔려온 중형~준대형 체급의 자동차인 쏘나타, 그랜저, 싼타페는 비교적 선방하고 있다. 내년 1분기에 완전변경을 앞두고 있는 쏘렌트가 팰리세이드 등에 밀려 1월에 4,000대 밑으로 떨어졌다가 2월에 다시 4,000대를 넘겼다.

체급이 대형으로 넘어가면 신차 효과를 오래 기대하기 어렵다. 몇 년 사이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나 신형의 출시 시기가 빨라진 때라면 더욱. 대형 세단은 개인 고객보다는 법인 차량 수요가 많다. 우리나라 20대 주요 대기업의 승진 인원만 해도 연간 2,000대 이상의 신규 시장이 반짝 열린다. 제네시스 브랜드의 고급화를 염원하는 현대차 입장에서는 대기업의 임원들이 제네시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이미지에 도움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에쿠스 2세대 부분 변경은 12월, G90 1세대는 12월, G90 페이스리프트 버전은 11월에 출시했다. EQ900은 벤츠의 S클래스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기업 임원진이 타는 자동차로서 자리매김했다. 쌍용차의 체어맨이 상품성 개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제네시스 EQ900에 밀렸고, 결국 판매 부진을 극복 못해 2018년 초에 단종됐다.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서 국산차에서 선택할 수 있는 고급 세단이 EQ900 말고는 딱히 없었던 것이 잘 나갔던 이유지만, 체어맨의 빈 자리를 대신할 1세대 K9의 포지션이 애매했던 것도 한몫했다.

K9는 2012년에 출시된 뒷바퀴굴림 및 네바퀴굴림 구동방식의 기아차의 고급 대형 세단이다. 오피러스의 후속 모델로 개발됐지만 시작하는 배기량이 달랐고 오피러스는 앞바퀴굴림이었기 때문에 포지션 상으로 오피러스보다는 엔터프라이즈의 후속 모델로 보는 게 더 맞다. ‘사장님 자동차’보다는 ‘부사장님 자동차’로 인식됐는데 브랜드 이미지와 가격 정책 때문이다. 가격대가 당시의 현대 제네시스(차종)와 현대 에쿠스에 있었는데 고급차로서의 포지셔닝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프리미엄을 지향했던 국산차들은 기본적으로 전용 앰블럼을 달고 있었다. 제네시스, 에쿠스, 체어맨, 베리타스 모두. 오히려 가격을 더 낮춘 채로 출시했으면 합리성을 겨냥한 고급 세단으로서 자리잡았을지도 모르지만 가격대가 제네시스와 겹쳐 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2015년 11월에 현대차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표방하는 제네시스를 출범하면서 2세대 제네시스는 제네시스 G80, 현대 에쿠스는 국내는 EQ900, 수출용은 G90으로 바꿨다. 현대차그룹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를 고급 브랜드로 키운다는 계획은 자연스럽게 기아차의 K9의 입지를 더 깊숙한 모래바다로 밀어 넣어버렸다. G90으로 바뀐 EQ900이 페이스리프트되기 전까지는.

꾸준히 하다 보면
한 번쯤은 기회가 온다

강아지 강씨를 쓴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강아지를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이해하는 반려견 행동 전문가 강형욱은 강아지를 훈육할 때 채찍과 당근을 효과적으로 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채찍만 휘두르면 주인과 멀어지거나 공격성이 커질 수 있고 당근만 주면서 오냐오냐 키우면 오라고 할 때 안 온다고. 수준에 맞는 훈련 뒤에 주는 즉각적인 간식 보상은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강아지들을 온순하게 만들었다.

2018년 4월에 출시된 K9 2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명확한 개성을 갖게 됐다. 쉽게 달리 표현하자면 예뻐졌다. 처음부터 예뻤고 상품성이 좋았다면 지금의 변화가 덜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수 있다(다소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연히 최근 세대 자동차는 이전 세대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 최신 디자인 기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예쁜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우리는 최근 몇 달 동안 그렇지 않은 사례를 경험한 적 있다. 기아차의 K9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해보이는 이유다.

벤틀리 출신의 이상엽 디자이너의 영향일까, 리어램프가 벤틀리 컨티넨탈 GT, 리어 디자인은 플라잉 스퍼와 닮은 데가 있다. 앞모습의 변화도 반갑다. 호랑이코 그릴을 대담하게 키우면서 호랑이코였던 ‘흔적’만 희미하게 보인다. 헤드램프 안에서 입체적으로 전조등을 감싸는 두 줄의 주간주행등은 K9만의 시그니처로 삼아도 될 듯하다. 이 번뜩이는 램프로 앞길을 환하게 비추면서 최선을 다해 모래바다에서 힘겹게 올라왔고 오랜만에 맞이한 빛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2018년 4월에 출시돼 그 달에 1,222대가 팔렸고 5월에 1,705대로 판매량 정점을 찍고 나서 8월까지 하락세를 보이다가 1,000대 초반에서 안정세를 유지해왔다. 2월에 처음으로 906대를 기록해 1,000대 밑으로 떨어졌지만 제네시스의 대형 세단은 하락폭이 더 크다. G90은 2018년 3월부터 1,000대를 밑돌다가 9월에는 309대로 떨어졌고 페이스리프트 모델 출시 후인 12월에 2,139대까지 올라갔다가 올해 2월 다시 960대로 떨어졌다. G80은 완전변경 모델의 출시를 앞두고 올해 2월에 처음으로 2,000대가 깨져 1,873대를 기록했다. K9의 포지션은 여전히 애매하지만 1세대보다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됐다. 기아차는 K9을 기사를 두고 타는 차인 쇼퍼드리븐이 아니라 오너드리븐을 더 강조한 차임을 밝힌 적 있다. 이는 현대차의 G90과 다른 노선이라는 이야기가 되고 경쟁 차종이 G80에 더 가깝다는 의미가 된다.

K9의 트림을 높일수록 수입 프리미엄 세단과 가격 차이가 좁아지기 때문에 경쟁력을 잃기 쉬워 하위 트림에서 경쟁력을 가진다. 1세대에서는 쓸 만한 옵션은 모두 중상위에 있었기 때문에 상품성에서 아쉬움을 보였지만 지금 2세대는 하위 트림에서도 가격에 비해 좋은 구성을 가져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됐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큰 차가 선호됐는데 이는 실용성보다는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중형~준대형 체급의 자동차 판매량이 가장 높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그런 구매 성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방증을 K9이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고급 대형차라고 해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하는 것에 매리트를 느끼는 사람이 전보다 많아졌고 대형 세단을 타고 싶지만 다소 부담을 느꼈던 소비자를 유인하는 역할도 했다. 비슷한 가격대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넓은 자동차라는 점도 매력이다.

이런 상황에서 G90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디자인에서 꽤 진보적인 선택을 했다. 전면의 거대한 오각형 그릴과 후면의 면발광 리어램프는 호불호가 꽤 극명하게 갈린다. 쇼퍼드리븐 자동차이기 때문에 승차감에 있어서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지만, 2015년 출시된 EQ900 만큼의 판매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변화된 시장 흐름과 함께 무난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디자인이 기여한 부분이 있다. 네임밸류와 역사를 생각했을 때, 제네시스 G90의 큰 위협 중 하나가 K9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제네시스 브랜드의 위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영화 짝패에서 장필호(이범수 분)가 다 죽어가는 정태수(정두홍 분)에게 던진 대사다. 듣고 보니 실로 그러하다. 입으로 자신이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당장은 증명하지 못할 사실로 현재를 포장하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로 보여 주면 스스로 알리지 않아도 주위에서 알아준다.

기아차의 K9은 아직 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가격, 상품성 등에서 경쟁 차종으로 잡은 G80과의 판매량 차이는 꽤 크기 때문. 하지만 기아차는 K9의 잔잔한 성과에서 얻은 게 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고급 세단이라는 틈새시장을 알게 됐다. 한때는 시대에 안 맞는다 여겨졌던 가치가 어느 순간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격했다. G80은 아직 제네시스의 새로운 디자인 기조를 물려받지 않은 상태다. 빠르면 올해 상반기에 만나게 될 3세대 G80을 얼마나 방어하느냐에 따라서 K9이 가진 우주의 크기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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