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의 여러 요소 중 소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충전소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고, 대부분의 충전소가 완충까지 빨라야 1시간 내외다. 그렇다 보니 한번 충전하고 나서 최대한 멀리 가는 전기차를 선호하게 되고, 제조사 또한 내연기관은 연비를 중요시하는데 반해 전기차는 주행거리를 강조하는 편이다.

이 주행거리는 인증 기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유엔 유럽경제개발기구가 개발한 WLTP와 미국 환경보호청 기준인 EPA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WLTP 기준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국내는 미국 EPA 기준에 추가 보정식을 넣다 보니 WLTP 기준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유럽산 전기차들이 국내에서 인증 거리가 짧아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에 국내에 진출한 몇몇 브랜드들은 직접 실험을 통해 주행거리를 증명하겠다고 나섰다.

글 이진웅 에디터

유럽 전기차가 국내에서
주행거리가 줄어드는 이유는?
최근 국내에 출시된 벤츠 전기차 EQA는 유럽에서 426km로 인증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보다 100km 이상 줄어든 306km을 인증받았다. 처음에는 나름 괜찮은 가격을 책정해 호평을 받았지만 주행거리가 공개되고 나자 크게 혹평 받았다.

같은 차로 테스트하면 주행거리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야 하는데, 왜 국내만 들어오면 주행거리가 짧아질까? 그 이유는 유럽과 국내의 주행거리 측정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행거리 표시는 인증 기준에 따라 WLTP와 EPA 두 가지로 나뉜다. WLTP는 기준 NEDC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유엔 유럽경제개발기구가 개발한 것으로, 23km의 거리를 30분 동안 주행하며, 평균 주행 속도 47km/h, 최고 속도 130km/h로 테스트를 진행한다. 또한 다양한 주행 환경 속에서 테스트를 진행한다. 그 덕분에 이론적인 주행거리를 측정하는 NEDC보다 실제 운행 환경에서의 주행거리에 가까워졌다.

반면 미국은 별도 기준인 EPA를 사용한다. 전 세계적으로 길이 단위를 km 쓸 때 미국은 마일을 쓰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PA는 미국 환경보호청의 기준을 따른 것으로, WLTP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완전히 충전된 전기차를 시뮬레이터 위에서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주행한다. 시내 주행은 물론 고속주행까지 가상의 도로를 활용한다. 별도의 공간에서 측정을 하는 만큼 기온, 배터리 상태, 공조기 작동 등 변수가 없기 때문에 테스트에서 얻어진 값의 70%만 인정한다. WLTP 기준으로 측정한 주행거리에서 10~15% 정도가 짧아진다고 한다.

국내 환경부는 기본적으로 미국 EPA 방식을 따른다. 별도의 공간에서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주행하며, 그 결과의 70%만 인정하는 것까지는 EPA와 동일하다. 여기에 환경부는 5-Cycle이라는 보정식을 추가로 대입한다. 시내 주행, 고속도로주행, 급가속 및 고속주행, 에어컨 가동 상태, 낮은 기온 등 상황을 고려해 만든 보정식이다. WLTP보다 까다로운 EPA에 추가 보정식까지 적용되다 보니 WLTP와 비교해 주행거리가 많이 차이 나게 된다.

까다로운 테스트 방식 때문에
주행거리가 짧게 나온 차가 많다
국내 환경부의 까다로운 테스트 방식 때문에 유럽산 전기차들이 국내에만 들어오면 주행거리가 많이 차이 난다. 포르쉐 타이칸 4S 퍼포먼스 배터리+ 모델은 WLTP 기준으로 463km로 인증받았지만 국내에서는 289km로 줄어들었다. 무려 174km나 차이 난다.

아우디 E-트론 55콰트로는 WLTP 기준으로 436km로 인증받았지만 국내에서는 307km로 줄어들었다. 르노 조에는 WLTP 기준으로 395km을 인증받았지만 국내에서는 309km로 줄어들었다. 푸조 e-208은 WLTP 기준 340km을 인증받았지만 국내에서는 244km로 줄어들었다. 국내에서 주행거리가 대폭 줄어든 까닭에 EQA나 조에, e-208 등 몇몇 차들은 5,900만 원을 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고보조금이 최대 금액인 800만 원보다 적게 책정되었다.

국내에서 실 주행은
인증 거리보다 길게 나오는 편
국내에서 주행거리는 WLTP보다 짧게 인증받았지만 정작 실 주행해보면 그보다 길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289km을 인증받은 포르쉐 타이칸 4S는 실 주행 결과 400km 내외까지 주행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르노 조에 역시 실 주행 결과 WLTP 기준에 근접한 390km 정도까지 주행하기도 했다.

유럽차는 아니지만 아이오닉 5 역시 실제 오너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400km 대 후반까지 주행 가능하다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면 국내 주행거리 인증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몇몇 브랜드들은 직접 실험을 통해
전기차 주행거리를 증명하고 있다
국내에서 전기차 주행거리가 짧게 인증되자 몇몇 브랜드들은 직접 실험을 통해 인증 주행거리보다 더 길게 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벤츠는 최근 국내에 출시한 EQA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대략 380km 가량의 거리를 충전 없이 완주하는데 성공했다.

포르쉐는 지난 5월, 강원도 고성에서 포르쉐 타이칸으로 인증 거리인 289km을 넘는 350km 장거리 시승 행사를 열었다. 그 결과 대부분 350km를 달리고도 배터리 잔량이 20% 내외로 남았다고 한다.

(사진=현대자동차)

현대차도 이 대열에 동참했는데, 아이오닉 5(롱 레인지 후륜구동, 19인치 휠+빌트인 캠+비전 루프, ECO 모드)으로 최북단 충전소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주민센터 충전소에서 출발해 최남단 충전소인 전라남도 해남군 땅끝마을 충전소까지 무려 12시간 동안 616.9km을 주행하기도 했다. 험난한 진부령 고개부터 고속도로까지 다양한 도로를 주행하고도 잔여 주행 가능 거리는 101km나 남았다고 한다.

물론 현대차의 실험은 전비가 잘 나오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서(평균전비 10km/kWh) 주행한 것이지만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인증 주행거리보다는 길게 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실 오너들도 400km 대 후반 정도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직까지 정부는
주행거리 측정 방식 개선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국내 주행거리 인증 기준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주행거리 측정 방식을 개선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당분간 유럽 전기차들은 국내에서 판매될 때 여전히 WLTP보다 대폭 짧아진 주행거리를 인증받게 될 전망이다.

주행거리에 영향을 받게 되는 국고보조금도 여전히 최대치보다는 적게 책정될 것이고, 짧은 주행거리로 인해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일으켜 저조한 판매량으로 이어지게 된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제조사들이 직접 나서서 실험을 하겠는가? 문제가 있는 부분은 하루빨리 개선할 필요가 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