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본격 스포츠카 탄생
엘란과 기아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시작부터 쉽지않은 길을 선택했던 기아차
엘란, 그 이름은 바로 영국에서나 들어봤을법한 이름이자, 1990년대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서 쓰일법한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 엘란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기아차에서 로터스 2세대 엘란의 생산권을 사들여 생산한 제대로 된 스포츠카였다.
당시 기아차는 세피아와 스포티지의 성공적인 결과를 거둬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고, 세피아의 개발 이후 당시 기아차 김선홍 회장은 ‘기아’라는 이름을 내걸은 스포츠카가 필요로 했다. 원천기술이 없던 기아차는, 과거 크레도스와 스포티지의 스티어링 튜닝값의 논의로 왕래가 있었던 점을 이용해 로터스의 원천기술을 사 와서 기술 축적을 도모하고 추후 국산화를 진행하여 ‘기아차’만의 스포츠카를 만들길 꿈꾸며 엘란을 출시하게 된다. 오늘 이 시간은 시대를 앞서갔던 경량 스포츠카 기아 엘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글 권영범 에디터
경량화
머신의 정수
엘란의 태생지는 영국의 자동차 명문인 로터스다. 백야드 빌더로 출발한 천재 엔지니어 콜린 채프먼이 세운 회사로, 경량 스포츠카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회사이며 현재는 중국 지리 자동차 산하에 소속되어 있다.
엘란의 본격적인 데뷔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2년의 영국은 비틀즈가 ‘Love Me Do’라는 싱글을 발표했던 해였으며, 영국령이었던 국가 자메이카와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독립하는 한 해였다.
그런 역사적인 해에 당대 로터스의 기술이 집약된 경량 로드스터 엘란은, 포드 켄트 엔진을 개량하여 로터스만의 트윈캠 엔진을 만들어 냈고, 로터스의 자랑인 백본 프레임에 FRP 바디를 얹어서 출시하게 된다.
훗날 수많은 로드스터들이 1세대 엘란을 보고 참고하여 만들게 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마쯔다의 MX-5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오일쇼크의 타격과
콜린 채프먼의 타계
로터스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던 시절은, 1차 오일쇼크가 터졌던 1973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의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석유를 감산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여파는 전 세계적으로 타격이 심했다. 대한민국도 오일쇼크의 여파가 상당했는데, 영국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전반적으로 위축된 소비, 귀해질 대로 귀해진 가솔린은 자동차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로터스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어느 정도 모면한 로터스였지만, 경영은 적자 투성이었다. 이후 1974년부터 오일쇼크가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이후 1979년 다시 한번 2차 오일쇼크가 터지게 되고 1981년까지 총 2년간 지속되게 된다.
결국 만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콜린 채프먼, 그가 작고함과 동시에 경영은 사실상 불능에 가까울 정도로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1986년 GM에게 로터스 지분 상당수를 팔아버린 사연이 존재한다.
골수팬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오리 새끼
1986년 이후 로터스는 GM의 산하에 있는 그룹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컴포넌트를 사용하는 것이 요구된 만큼, 그들의 뜻을 따라야만 했었다.
그들의 요구 사항은 터보 엔진을 사용하는 것과 구동방식을 FF로 변경하는 것 두 가지를 제시하였고, 이 당시의 로터스 또한 개발비용 절감은 물론, 각국의 자동차 브랜드로부터 위탁 연구업무 역시 그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추가로 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FF 방식에 대한 기술력을 과시하던 시기였기에 로터스에게는 ‘기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각 국가의 미디어에선 꽤나 호평을 받았다. 이스즈제 4XE1 터보 엔진은 1.6L의 배기량을 갖췄지만 최대 출력 155마력 최대 토크 20.4kg.m는 가볍디가벼운 엘란을 움직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 성능을 인정받은 것 대비 상업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로터스의 골수팬들은 “로터스만의 정통을 잃었다”, “스포츠카에 FF가 웬 말이냐”, “일제 엔진 올린 거 치곤 너무 비싸다”라며 외면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자동차 문화
태동기에 나타나다
1996년 7월 기아차는 엘란을 출시하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은 기아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란을 출시하기까지 꽤나 많은 사건이 존재했었다.
이유인즉 높은 4,000만 원에 달하는 제조원가, 2,700만 원의 낮은 판매 가격은 연간 50억 원이라는 적자를 유발했고, 로터스의 수제작 시스템에 맞춰 개발된 엘란은 기아차의 대량 생산 시스템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홍의 회장은 ‘겉모습만 스포츠카’가 아닌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된 스포츠카를 만들어내길 원했었고, 경쟁사인 현대차와 태생이 다르단 걸 보여줘야 했기에 모든 손해를 감안하고 무리해 서라도 출시를 감행했던 것이었다.
우선 엘란을 개발할 때 원래 달려있던 이스즈제 터보 엔진을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기아차의 명물, 장영실상 수상에 빛나는 T8D를 손봐 하이캠을 올려 최대 출력 151마력, 최대 토크 19.0kg.m의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고, 국내 실정에 맞게 지상고도 10cm 가량 높여서 출시하게 된다.
엘란이
실패한 이유
엘란은 발매 초부터 각종 논란에 휩쓸려,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엘란은 수작업으로 소량만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주문생산방식’의 차량인 만큼, 일반 양산차와는 다르게 판매를 했어야 했다.
그렇기에 1996년 기준으로 2,750만 원이라는 고가의 차량을 구입할만한 실수요층을 공략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독립적인 판매전략이 세워져야 했으나, 일반 기아차 매장에서 다른 양산차들과 다를 것 없이 전시 및 판매가 이뤄졌었다.
구매를 하고자 하는 분위기 형성이 이뤄지지 않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2인승 로드스터는 실수요층과 매니아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백야드빌더 차량의 특성이 무시되었다. 고가의 차량인 만큼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품질에 미치지 못한 점은, 백야드빌더의 “ㅂ”자도 생소하던 시절이었기에 비싸기만 하고 쓸모없는 차로 전략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결국 1999년
1,055대를 마지막으로 단종
위에 전술한 내용 덕분에 각종 미디어와 소비자들은 현대에서 출시했던 ‘티뷰론’과 수많은 비교를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값이 훨씬 더 저렴하고 스포티하게 생긴 티뷰론이 더 잘 팔리게 되는 상황이 돼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엘란을 좋은 조건에 사원 판매로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아차 직원들마저 잘 안 샀었다. 그만큼, 시대적인 배경이 스포츠카라는 카테고리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시기였음을 잘 나타내는 부분이다.
이후 1997년 IMF를 겪은 기아차, 이들고 결국엔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고, 신차 개발은 속속들이 무산되기 시작했다. 신차라고 내놓는 거라곤 기존 차량들을 페이스리프트 하여 내놓는 수준의 차량들 뿐이었고, 결국 버티다 못한 기아차는 1999년 현대자동차에게 인수되버리고 만다.
당시 기아차를 인수한 현대차는, 라인업이 겹치는 차량을 속속들이 단종시키는 정리 작업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겹치지 않은 차량들은 살려둬 후에 그들이 활용하도록 조치를 취하였으나, 엘란은 겹치는 차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조원가가 중형차 한 대 값을 손해 보고 파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고민의 여지도 없이 바로 단종 처리가 되었고 1,055대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기아차는 과거 80년대부터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브랜드였다. 80년대 중반 무렵 시작된 국내 모터스포츠 역사에, 동양인 최초로 WRC 우승을 거둔 전설의 드라이버 박정룡 교수를 기아차 테스트 드라이버로 영입한 것과, 콩코드와 프라이드로 무패신화를 써 내려갔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열악했던 그 시절에 개척자나 다름없는 존재였음은 분명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욕심이 과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원래의 기아차는 없질 운명이었을까? 그렇게 피나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던 기아차는 이제 점점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면 남들은 흉내만 내기 바빴을 때 그들은 진짜를 만들어냈고, 남들은 상업적인 모습에 포커스를 맞출 때 그들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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