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싼타크루즈의 전신 포니 픽업
80년대 그 시절 소상공인들의 버팀목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
대한민국의 첫 독자 생산 모델이자 첫 고유모델 승용차 현대 포니, 그 시작은 흑백 TV도 귀하던 시절인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마을운동 자조발전단계의 막바지를 향하던 그날의 대한민국은 포니의 탄생으로 뜨거운 반응과 성원에 힘입었던 시기였기도 했으며, 당시 영업용과 자가용의 전무했던 베스트셀러 기아차의 브리사를 단숨에 압도하기도 했다.
포니는 ‘최초’란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에콰도르에 1975년 7월에는 에콰도르에 5대를 수출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승용차 부문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차량이다. 그런 포니는 상당히 다양한 라인업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포니 1은 4도어 패스트백, 포니 2는 5도어 해치백을 시작으로, 왜건, 3도어 쿠페, 그리고 오늘 만나볼 차량 픽업 모델이다.
글 권영범 에디터
포니의 해치백과
패스트백의
정의를 구분하고 넘어가자
간혹 포니 1 그리고 포니 2의 대표 모델을 구분 지을 때 해치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가끔씩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잠시 그 정의를 구분 짓고 넘어가고자 하기 위해 글의 초장부터 ‘안내’차원의 글을 적는다.
포니 1은 정확하게 패스트백 타입의 차량이다. 모양새는 단아한 해치백 타입의 차량이 분명하지만, 포니 1은 트렁크가 따로 구비되어 있는 차량이다. 즉, 트렁크 개폐 시 3열 뒷창문이 같이 들어올려지는 방식이 아닌 트렁크만 따로 열리는 구조다.
이와 동시에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포니 2는 해치백으로 구분 짓게 된다. 트렁크를 개폐 시 3열 뒷창문과 함께 열리며 당시 고급형 트림에는 국산차 최초로 뒷유리창에 와이퍼를 부착하여 판매를 했다.
당시에는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 기능을 부각시키는 TV 광고도 존재한다. 간단하게 한 번 더 정리하자면 포니 1은 4도어 패스트백, 포니 2는 5도어 해치백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소상공인들의
좋은 친구
1976년 포니 1이 출시가 될 무렵 동시에 출시된 포니 픽업은 생김새를 보아하니 마치 승용차 모델을 깍둑 썰어서 적재함을 만든듯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1970년대 당시 기아마스타에서 출시한 삼륜 트럭 모델 T-600을 기점으로 T-2000 모델들이 소상공인들의 발이 돼주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3륜 모델 특성상 거동이 불안정하고 뻑하면 전도되는 사고가 빈번했던 시절이었고, 1972년 6월부터는 2~3륜 차의 고속도로 통행을 전면 금지시키면서 가치가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포니 픽업의 탄생은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최대 적재 능력은 400kg으로, 채소를 파는 노점상, 연탄 배달, 동네 슈퍼마켓, 가전제품 배달 및 수리기사, 방역차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빠른 세대교체로 인해 3륜 트럭은 순식간에 씨가 말라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기아차에서도 이를 대항하기 위해 ‘브리사 픽업’을 판매했었으나 상대가 되질 못했고, 지방 소도시에서나 조금 흔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1982년
페이스리프를
거친 포니 2 탄생
포니 1의 후속으로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포니 2가 1982년에 출시되었다. 포니 1에서 선보인 3도어 해치백과 5도어 왜건은 판매량에서 굉장한 약세를 보여 단종되었고, 기존 4도어 패스트백 타입이 5도어 해치백으로 변경되는 시점이다.
승용 모델은 택시와 자가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무렵이었고, 픽업 모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픽업 모델을 자가용으로 구매해가는 비율도 무시 못 할 정도로 많았다고 했는데, 과거 70~80년대 세법에선 포니 픽업이 ‘화물차’로 분류되었기에 세금이 저렴했다고 한다.
여하튼, 포니 2 픽업을 출시하게 되면서 상당히 이색적인 모델도 출시하게 된다. 그건 바로 포니 2 픽업 컨버터블 탑 모델인데, 포니가 단종되기 1년 전에는 1984년도에 라인업에 추가가 된 모델로써 적재함에 호루를 씌워 눈과 비를 막아줌으로써 적재된 짐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 컨버터블 모델 역시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꽤나 많이 팔렸던 모델이었다.
당시 용달차와 세운 상가를 중심으로 “어! 너두? 야! 나두!”를 외치며 너도 나도 포니 픽업을 타고 다니던 시절에, 영 좋지 못한 경쟁상대가 나타났으니…. 그 차는 바로 새한 자동차의 맥스 디젤이다.
포니 픽업의
독점을 뺏어가다
새한 자동차의 제미니를 베이스로 한 소형 픽업 트럭이자, 평민이 양반을 꿈꾸는듯한 족보를 가진 새마을 픽업의 정신적 후속작인 맥스 픽업, 초창기에는 제미니의 이스즈제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여 나왔으나, 별달리 호응을 얻지 못해 어지간히 안 팔렸다.
이를 고민하던 새한 자동차는 마침 자사에서 팔고 있는 ‘로얄 디젤’이 번뜩 생각이 났다. 1.9L 디젤 엔진을 본인들이 만들어 팔고 있단 걸 자각한 그들은 재빨리 픽업 모델에 적용하였고, 1980년대 경유값이 L 당 90 원 후반대에서 100 원 하던 시절이 맞물려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포니 픽업의 최대 적재량이 440kg이었다면, 맥스 디젤은 최대 적재량이 무려 850kg에 달했다. “커피가 그냥 커피라면 이건 티오ㅍ….”가 생각날 정도로 당시에는 제법 어나더 레벨을 표방하였다.
조금 더 지나서는 트력형 적재함을 적용한 3방향 덱을 적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포터에서 흔히 보는 적재함과 같은 방식의 적재함을 가졌기에 적재성은 더욱 향상되었으며, 과적이 일상인 용달계에 새로운 이단아로 자리매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니 픽업이 잘 팔렸던 이유
간단하다. 적당히 아담한 차체 사이즈는 좁디좁은 80년대 골목길을 누비는데 딱 맞는 사이즈였고, 유지 보수가 간단했으며, 결정적으로 80년대 당시 감가상각이 별로 없는 모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델이 바로 ‘포니 시리즈’였기 때문이다.
7080세대를 겪었던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들어보았으며, 그중 실제로 1987년에 실제로 포니 2 승용 모델을 중고차로 구매하여 운용했던 A 씨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을 해보았다.
A 씨가 말하길 “당시 1984년식을 230만 원을 주고 1만 km도 안된 차를 구매했었다. 차는 그 당시에 보러 갔을 때 겨자색 비슷한 색이랑 은색이 있었는데, 겨자색은 너무 택시스러워서 쳐대도 안 봤다. 차는 라디오만 달랑 달린 옵션이 없는 차였다. 그땐 그냥 차를 가지고 있는 게 상징적인 시기였으니 말이다. 내가 1987년에 차를 구매하고 1989년에 차를 매각할 당시 딱 10만 원 깎인 220만 원에 차를 판매했다. 그때 판매했던 킬로수가 대략 2만 km 후반대였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증언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현대차의 감가 방어율이 높은 건 똑같다는 점이 유난히 부각되었다. 심지어 픽업 모델의 경우도 그렇게 싼 가격대는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70년대~80년대는 차가 귀했던 시절은 확실한듯하다.
포니는 1985년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FF 트랙션의 트렌트를 따라 포니엑셀을 출시한 이후, 한동안 병행 생산을 하다가 연비와 안전성의 이유로 승용 모델은 1988년 4월에 단종이 되었다. 이후 1990년까지 포니의 LPG 영업용 모델, 픽업 모델은 병행 생산하여 판매가 이뤄졌지만, 1986년 포터의 출시로 픽업 모델의 판매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고 이와 더불어 1990년에는 삼원촉매 장착이 의무화되면서 승용 픽업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늘날에 포니 픽업을 다시 찾아보면 상태 좋은 차량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승용 모델은 개체 수가 많이 귀해졌지만, 픽업 모델은 오랫동안 사용한 오너들이 꽤나 많은 탓에 복원된 포니 픽업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해 있고, 배출가스 저감제도 때문에 남들이 잠든 시간대에 은밀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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